[뉴스] 기준치는 과학적인가 이데올로기적인가?

언론의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에 대한 고찰 [2]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를 통해 계산과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도처에 널려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추가적인 위험을 발생시킬 수 있으며, 위험은 발생지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영향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더욱 크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광우병이나 메르스와 같은 신종 질병은 물론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대규모 오염, 원전 사고 등 과학 지식의 활용과 확대로 인한 사고인 ‘가공된 위험’이 잇따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보도를 살펴볼 때 ‘안전하다’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선 기사에서 살펴봤듯,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조선일보】

“오염수 노출을 상정해 시뮬레이션한 일본의 결과를 검증해 보니 넙치나 게, 미역 모두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에 장기간 노출돼도 국제 안전 표준을 넘지 않는 것으로 확인”

“고리원전 50Tbq, 후쿠시마는 22Tbq 방출... 팩트 눈감은 ‘공포 선동’”

“후쿠시마 방류 때 한국인의 방사선 피폭량은 'X-레이 1000만분의 1′”

“삼중수소도 방사성 핵종 위험도 과학은 모두 '안전하다' 가리켜 방사능은 안보여서 더 무섭지만 정치가 왜곡시키지는 말아야”

<조선일보>는 일본 정부가 국제 안전 기준에 따라 오염수를 처리하고 방류할 계획이라는 점과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오염수의 해양 방출이 인체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보도한다. 즉 일본 정부와 국제기구의 발표를 바탕으로 일본 방사성 오염수의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 이하로 관리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기준치’ 이하로 관리하면 기존 원자력 발전에서 나오는 방사성 물질의 수치와 비교하면 오히려 낮다는 것이 기본적인 주장이다.

【한겨레】

“후쿠시마 오염수를 대량으로 수십 년에 걸쳐 바다에 방류하는 것은 유례없는 시도로 아직 그 영향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 모델이 없다. 100%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애초에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방류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면 아마도 허용 수치라는 기준 자체가 달라졌을 것”

“오염수에 잔류하는 방사성 핵종이 일본의 기준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안전 기준은 총량이 아니라 물에 남아 있는 방사성 물질의 비율로 규제한다. 도쿄전력은 오염되지 않은 물을 타서 그 기준을 맞추는 것”

<한겨레>는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서가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더 철저하고 독립적인 검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방사성 물질이 장기적으로 인류와 해양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예측할 수 없으며, 현재의 안전 기준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도한다. 특히, 시민단체의 집회 등을 보도하고, 과학기술로 인한 역사적 사건인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나타난 살충제 사례를 드는 등 복잡계적 특성을 가진 생태계에 인간의 안일한 판단이 미친 영향을 설명하며 우려를 강하게 나타냈다.

사진출처 BBC NEWS 코리아
사진출처 BBC NEWS 코리아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방류) 사안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역시 위험이다. 위험성을 결정하는 과학적 진실에 대해 논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일례로 정치인 혹은 관련 전문가들이 SNS 및 공개적 발언에서 방출수를 희석하여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등 발화가 뉴스를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안전’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전문가와 언론 보도에서 안전을 주장할 때 근거로 삼은 것이 바로 ‘기준치’다. 이때의 각 언론이 말하는 기준치 이면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기준치’의 이면을 살펴보는 데 있어 푸코의 권력-지식의 관점을 사용하여 설명한 학자가 있다. 사토 요시유키와 다구치 다쿠미는 후쿠시마 사고 발생 이후 원자력 발전을 푸코적인 ‘지식-권력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푸코에 따르면, 지식은 언제나 권력관계를 동반한다. 원자력 발전이란 ‘근대적’ 과학기술로 자본과 지식이 고도로 축적된 산물이고, 이를 위한 지식과 권력은 서로를 포함하며 재생산하며 복합적으로 구성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과 권력은 현 체재,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안전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국가 권력이 안전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간의 안전을 프레이밍 하려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토 요시유키와 다구치 다다미는 이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안전 기준치를 바탕으로 설명한다. 사고 직후 설정된 기준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준치를 낮추고, 원전 사고 발생지역의 안전 구역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가 사회적 비용, 복구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었기 때문으로 경제 논리에 의해 안전 논리가 재생산된 것이라고 보았다. 즉, 권력이 경제적-사회적 비용의 증가를 막기 위해 어느 정도 인간이 죽을 가능성을 허용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준치라는 개념은 과학적 개념이 아닌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안전 기준치’, ‘방사능 허용치’, 즉 안전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국가와 자본의 ‘논리 구조’ 내에서 그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그 외의 모든 우선순위는 부인한다. 다시 말해, 국가와 자본은 원전을 위해 안전 이데올로기 만들어내고, 실제로 원전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능성을 사후에도 부인하고 있다. 일본은 동일한 방식으로 오염수를 처리하고 있다. 대상이 자국민에서 전 세계로 넓어진 것뿐이다. 그렇게 안전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씌워져 있다.

안전과 기준치를 과학적 사실로서만 인식할 수 있을까? ‘기준치’ 그 이면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있다. 모두의 마음에 드는 정답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사회에서 갈등은 지속되고 사회적 합의는 요원해진다. 이제 “기준치를 기준으로 과학적으로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기준치를 통해 위험은 어느 수준까지 허용되는지, 허용되지 않는지”로 봐야 한다.

앞선 기사에서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보도 방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젠 다시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기사의 인트로다. “지난해 8월, 일본은 후쿠시마 제1원전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이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이뤄진 투기는 모두 8차례로, 방출한 오염수는 6만 2,400톤에 달한다. 방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가 나오는 과정에서 일본은 9차 해양 방류를 통해 오염수 약 7천 817톤을 처분했다. 이제 약 7만 1,200톤이다. 방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글┃김성재(기후위기 부천비상행동 활동가)